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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뛰어난 조각가인 베르톨도 문하에서 배우기 위해 '산 마르코 정원'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역시 미래의 조각가로 선발된 또 다른 학생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피에트로 토리자노(1472-1522)였다.  
피에트로는 미켈란젤로가 갖지 못한것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귀족가문 출신이었고, 경제적으로 유복했으며, 대단히 미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그보다 재능이 뛰어났다. 두 소년은 격렬한 예술가의 자존심을 갖고있었다. 다시 말해서 둘 사이에는 다툼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숙명적인 싸움은 미켈란젤로가 도착한 직후에 일어났다. 둘이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 예배당에서 그곳의 예술품을 스케치하고 있을 때 미켈란젤로가 피에트로의 데생을 놀려댄 모양이다. 화가난 토리자노는 힘껏 팔을 휘둘러 미켈란젤로의 코를 가격했다. 그런데 너무 세게 때리는 바람에 미켈란젤로의 코뼈가 내려앉고 말았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그후 평생동안 그렇게 많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면서도 그 자신은 코가 납작 찌그러진 은퇴한 권투선수처럼 보였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아끼는 젊은이의 얼굴이 망가진 것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토리자노를 당장 피렌체에서 추방시키기까지 했다.



그 전에도 별로 잘생기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그때부터 지독하게 못생긴 얼굴이 되었다. 그는 외모때문에 실연의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고 낭만적인 사랑에 빠질 가능성을 애써 피하여 일과 성공에 몰두하는 방법으로 열등감을 극복했다. 그는 점점 더 완벽주의자와 이기주의자가 되어갔다.

오만하고 건방진 태도로 허세를 부림으로써 자신의 깊은 열등감을 감추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평생동안, 이 허세의 겉포장을 뚫고 그 밑에 숨어있는 고독하고 예민하고 사랑에 굶주린 몽상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사람은 불행히도 몇몇의 절친한 친구와 동료 뿐이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예배당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그가 유대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그가 유대의 영향을 받은 데에는 피코와 그가 보유한 수많은 책이 많은 역할을 했으며,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스승과 함께 유대 지식의 구전이라 할 수 있는 미드라시를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그가 미드라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있는 <에덴동산>이라는 패널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하는 지혜의 나무 앞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세에 하나를 제외한 모든 문화적 전통에서 그 나무의 열매인 선악과는 사과로 여겨졌다. 실제로 사과를 가리키는 라틴어 낱말 "male"는 "사악하다"라는 뜻으로, 사과의 악명높은 과거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렇게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악과는 사과라고 믿었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의 전승이었다.

신비주의적 원리에 따르면 신은 문제 자체 안에 이미 해결책을 만들어놓지 않고는 절대로 우리에게 문제를 내지 않는다. 아담과 이브는 금단의 열매를 먹고 죄를 지은 뒤, 자신들이 알몸인 것을 깨닫고는 수치심에 사로잡힌다. 그들의 즉각적인 해결책은 무화과 나무 잎으로 몸을 가리는 것이었다고 성서는 말한다.

바로 미드라시에 따르면 지혜의 나무는 무화과 나무였다.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예배당에 <원죄>를 묘사한 이 그림을 보면 지혜의 나무는 확실히 무화과나무이다.

이 밖에도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프레스코에 미드라시를 간접적으로 수없이 언급을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현대의 학자들은 이를 간과한채 완전히 무시하고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미켈란젤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탈무드와 함께 유대교의 비전으로 이루어진 카발라에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카발라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받은'을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이다. 카발라의 가르침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비밀의 지식을 알고 있는 자도 많지 않으며, 비밀의 지식을 '받을'수 있을만큰 성숙한 사람들에게만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카발라에 완전히 매혹되어,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카발라의 가르침이 준 영향을 찾을 수 있을 정도다. 그가 카발라에 집중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시 교회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미켈란젤로에게 표면의 형상보다 중요한 메세지를 내면에 숨기는 카발라의 은밀한 접근방식이 맞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미켈란젤로는 많은 훌륭한 선생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에게 자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피렌체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널리 인정받은 비범한 두 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신동이었던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백작이었다. 이들 두 스승의 영향은 미켈란젤로가 평생 창작한 작품의 대다수에 뚜렷이 드러나있다.

마르실리오 피치노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피치노의 가르침과 번역, 그리고 그의 플라톤 아카데미는 미켈란젤로가 그의 제자가 되었을때 쯤에는 이미 유럽 전역에 알려져있었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피치노에게서 이 철학 학파의 대담한 사상을 흡수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발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젊은 피코 델라 미란돌라였다. 피코는 고대 신비주의와 그리스 철학,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지적, 신학적 가교 역할을 한 카리스마적 건축가였다. 그는 모든 곳의 자유사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바티칸의 노여움을 샀으며, 열정적이며 감수성이 예민한 미켈란젤로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20년 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을 피코의 독특하고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한 항구적인 증언으로 남몰래 바꾸게 된다.

이 스승들 가운데 피치노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주치의의 아들이었다. 식스투스 4세가 교황자리에 오른 뒤 피치노는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중병에서 회복된 결과르 수도서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메디치가문의 제안에 따랐을 가능성이 더 크다. 성직자가 되면 교황청에서 벌어지고 있는 책략을 메디치가문에 알려줄 유용한 정보책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피치노는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와 인문주의에 바탕을 둔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미켈란젤로가 나중에 "나는 모든 대리석 덩어리 속에서 신체 각부의 자세와 움직임까지 이미 완벽하게 모양이 잡혀있는 형상을 마치 내 눈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또렷이 본다. 나는 내눈이 그것을 보듯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도록 그 아름다운 유령을 가두고있는 거친 벽을 깎아내기만하면 된다"고 설명했을 때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피치노의 이 절대 개념이었던 게 거의 확실하다. 이 플라톤적 사고방식에 물든 미켈란젤로에게 미술은 창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존재하지만 감추어져있는 절대적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었디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스승들은 뛰어난 화가도, 천재적 조각가도 아닌 놀랍게도 철학과 종교학에 정통한 인문학자들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스승에게 배운 뿌리깊은 인문학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자기 예술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던 것이다.